지난 11일 체육대회때 사회를 맡아 엄청 수고를 했던 천호진이가 최근 개봉작인 '비열한 거리'에서 황회장역으로 나왔더라.싸이더스에서 제작했고 여러모로 관심이 있어 지난주에 와이프와 함께 봤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주인공인 조인성(배재 후배라고 함) 보다도 천호진이의 역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봤었다. 이젠 중후한 역이 잘 어울리는 나이가 됐구나 하는 느낌과 극 중 캐렉터에 잘 녹아드는 연기를 하는구나 하는 걸 느꼈단다. 마지막 엔딩곡으로 나오는 호진이의 노래도 무척 감동적이었다.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들어보고 싶더구나.(호진이 핸드폰 연결음악이 바로 그 노래다)좋은 영화를 보고 왔는데 오늘 우연히 호진이의 인터뷰기사를 보게 되었다.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이곳에 올린다.잘 생긴 얼굴을 보고 싶으면 한글로 '무비위크'를 쳐서 이번주의 인터뷰기사를 보면 된다.<비열한 거리>천호진-Like an Old Pop <2009 로스트 메모리즈>로 충무로에 다시 발을 디딘 천호진은 <말죽거리 잔혹사> <범죄의 재구성> <주먹이 운다> <혈의 누> 등 화제작들에 연이어 출연해 왔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와 단단하게 매어놓은 타이, 독한 눈초리 하나로 금세 야심가가 됐다가, 고수머리를 흩트리고 배시시 미소를 지으면 금방 농촌총각으로 변할 수 있었던 배우 천호진. “나이가 들수록 멋이 배어나온다”는 유하 감독의 말처럼 천호진은 날이 갈수록 세월의 깊은 멋을 입고 있다. 언제든 꺼내 들어도 물리지 않는 올드 팝, 들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발견되는 주옥같은 음악 같은 배우. 올곧게 허리를 세우고 깊은 울림으로 관객들의 신뢰를 얻기 위한 그의 노력은 언제나 믿음직스럽다.My Way “ I’ve lived a life that’s full. I’ve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 중 예전에 하이틴 스타였다. 영광이다. 에이, 무슨.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인터뷰를 하재. 지금은 얼굴이 애들한테 밀려가지고 좀 그렇지. 하긴 나도 20대 때는 인성이만큼 했다.(웃음)언론시사에는 왜 오지 않았나? 솔직히 얘기하면 원래 기자시사에 가지 않는다. 그전에도 가지 않았다. 말이 막 나와서 미안하다. 기자들이 머리 빈 소리들 많이 해서 싫다. 팩트 확인도 안 하고 기사를 쓴다. 요즘 기사들을 보면 본질은 없고 껍데기만 울린다. 그게 너무 싫다. 뭐가 그렇게 싫던가? 지금 내가 연기한 지 23년, 24년째 돼간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 “그 장면 힘들었냐?”고 묻는 거다. 당연한 거 아닌가. 배우는 직업인데, 연기가 직업인데 힘든 게 무슨 대수인가. 내가 또 말 한번 터지기 시작하면 큰일인데 이거.(웃음) 괜찮다. 요즘은 연기자가 배우가 아니라 모델인 것 같다. 누구를 낮게 보거나 누구를 높게 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엄연히 다르다는 거다. 구분이 살아야 배우들 스스로가 관객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 홍보나 마케팅으로 사람만 끌어 모은다고 전부가 아니다. 작품과 홍보가 빗나가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래도 기획실 입장에서는 참 답답한 배우겠다. 답답하지. 죽으려고 그런다. 물론 요즘 영화판이 일주일 만에 ‘쇼부’를 봐야 해서 홍보가 더욱 중요해지긴 했지만, 예전에 단관 개봉할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외화가 더 세게 치고 들어왔으니까. 그래도 제대로 갈 작품은 어떻게든 입소문이 나서 가게 된다. 만드는 사람들이 후회 없이 올인하고 개봉에 대해선 잊고 겸허하게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떠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거다. 뚜껑 열고 알맹이가 없으면 욕을 먹는 건 당연하다. 작업 끝내면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다?관객들이 ‘수고했다’고 할 때 감사하다고 해야지, 우리가 먼저 나서서 떠드는 건 광대짓밖에 안 된다.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바뀌어야 한다. 큰 문제다. 그걸로 인해서 한국영화가 신뢰를 잃는다. 배우들이 영화 홍보하려고 토크쇼 나가는 게 싫겠다. 그거부터 없애야 한다. 절대 없애야 한다. 배우와 작품을 위해서 그들이 도와주는 줄 아나? 자기네 먹고 살려고 하는 거다. 왜 영화하는 사람들이 방송사에 질질 끌려 다녀야 하나. 영화로 관객들과 소통을 해야지 왜 포장만 하려고 하나. 한국영화가 조금만 잘되면 방만하게 까불고, 조금만 안되는 것 같으면 죽는 소리 한다. 좋든 나쁘든 그 길을 끝까지 버티며 관객들에게 신뢰를 줘야 한다. 요즘 인터뷰만 하면 안 좋은 소리가 자꾸 나와서 하기 싫다. 영화 얘기 하자.결국 좋은 배우가 되는 건 좋은 시나리오를 고르는 능력이다. 그게 중요하다. 일단은 시나리오에서 시작하는 거니까. 자기가 공부를 하고 혜안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한 거다. 로버트 드 니로가 나오는 영화는 일단 보게 되지 않나. 알 파치노도 중간 이상을 할 거라는 믿음이 있지 않나. 다 가지치기를 하고 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쌓여온 신뢰다. 그런 배우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너나 나나 개나 소나 닭다리 들고 나와서 홍보해야 할까? Both Sides Now “ I’ve looked at life from both sides now from win and lose and still somehow. It’s life’s illusions I recall. I really don’t know life at all.” -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 중 2001년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이후 참 많은 작품을 했다. 후회가 되는 작품이 있나? 끝날 때마다 후회된다. 요즘은 VIP 시사회 때문에 봤는데 예전에는 못 봤다. 장인이나 예술가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도공들이 작품을 완성해놓고 깨버리는 심정을 알 것 같다. 지나치게 겸손한 것 아닌가. 지난번 <데이지> 당시 인터뷰 요청을 여러 번 했지만 거절했다. 혹시 작품에 대한 후회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지>는 만족한다. 못해본 경험을 한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사람을 알아가는 게 좋았다. 작품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시스템적인 문제가 조금 있었을 뿐이다. 외국말로 번역을 해주는 전문 작가가 없었다. 유위강 감독이 그나마 경험이 많아서 직관적으로 찍었다. 그래도 비는 부분이 많았을 거다. 사실 그건 접고 들어갔다. 충무로에 프로 작가들이 훨씬 더 많아야 한다. 배우한테 줄 돈 삼분의 일만 떼어서 작가를 양산했으면 좋겠다. <데이지>도 프로 작가가 붙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 건 줄이지 말고. 나는 적게 받고 있으니까.(웃음) 폭력적인 영화를 싫어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단적으로는 조폭영화라고 할 수 있는 <비열한 거리>에 출연하기로 한 이유는 뭔가? 조폭영화이긴 하지만 폭력에 반하는 내용이고, 그걸 충분히 웅변하지 않나. 그런 웅변 없이 쓸데없는 폭력이 싫다는 거다. 자꾸 강의 같은 소리해서 미안한데, 드라마의 리얼함이 중요하다. 감정이입을 하고 드라마에 묻혀서 보다보면 무언가 뒤통수를 때리는 게 있지 않나. <비열한 거리>의 대본은 그게 있었다. 배우가 자꾸 뭔가를 시도하려는 게 화면에 보이면 그건 맛이 없는 거다. 유하 감독은 드라마에 대해 굉장히 정통한 사람이다. 이제 어느 정도 반열에 오른 것 같다. 완성된 영화를 본 후 시나리오 느낌과 같았나? 똑같았다. 그게 연출을 잘하는 거다. 시나리오 읽었을 때와 완성됐을 때 차이를 느끼면 큰일이거든. 간만에 말 많이 하니까 갈증 나네. 와인은 마실 줄도 모르고 맛도 모르는데 네덜란드 가니까 와인이 엄청 싸더라. 수퍼 가서 2~3,000원 짜리 와인을 물 대신 사마셨다. 맛도 모르고.(웃음) 술을 얼마나 잘 마시기에 물 대신 와인을? 많이는 못한다. 소주 마니아다. 기분 좋고 마음 맞으면 한도 끝도 없다. 자주 마시지는 않는다. 이제까지 맡았던 역할 중에 <비열한 거리>의 황회장이 가장 악하지 않나 싶다. 황회장이 제일 악하다. 인간이 진짜 악하다함은 상대방의 심성을 파괴한다는 거다. 살인이나 폭력은 용서할 수 있지만, 사기는 용서할 수 없다. 젊은 친구들이 황회장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살아본 사람들은 그런 게 잔인하리만큼 무섭다는 걸 알 것이다. 그만의 생존의 법칙이 확립된 거다. 어른스러운 영화가 나와서 너무 좋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품위가 있어야 돼”라는 대사를 치는 장면에서 갖가지 감정이 교차하더라. 황회장의 악랄함과 동시에 동전의 양면과 같은 생존의 정당성이 느껴졌다. 대사 참 잘 썼다. 유하 감독이 대사를 참 잘 쓴다. 나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대사가 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딱 두 가지만 알면 돼.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그 사람이 뭘 필요로 하는지.” 기가 막히는 대사다. 지혜로워지는 것도 두 가지다. 악하게 지혜로워지느냐, 인간답게 지혜로워지느냐. 유하 감독의 양면성이 좋다. 생각하면서 볼 수 있는 드라마다.Old and Wise “ And oh when I’m old and wise, Heavy words that tossed and blew me like Autumn winds that will right through me.” -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 ‘Old and Wise’ 중 40대 중·후반까지 TV를 계속 하다가 영화 쪽으로 넘어온다는 건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자존심 때문에 작은 역을 맡기가 어렵다. 나 같은 경우는 영화를 하고 싶어서 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항상 머리에 남아 있었다. 팔자가 그랬나 보다. 12년 정도 쉬다가 운 좋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는데, 신인이라고 생각했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대본 보고 다음날 바로 결정했다. 배역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나는 무조건 영화를 해야 했으니까. 이시명 감독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서 좋은 배역도 만나고 그 이후로 잘 풀렸으니까. 그 작품이 없었으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TV 드라마하고 영화의 차이는, 연속극 같은 경우 얘기를 줄줄 풀어야 해서 필요 없는 에피소드며 역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긴 이야기를 2시간으로 압축하기 때문에 큰 배역이든 작은 배역이든 상관없이 다 필요하다는 거다. 절제의 미학 하니까 <주먹이 운다>가 생각난다. 상철은 굳이 히스토리를 설명하지 않아도 무언가 묵직함이 느껴졌다. 난 정말 배역 운이 좋다. 사실 류승완 감독에 대해 몰랐다. 이 얘기하면 승완이 죽이려고 하겠는데.(웃음)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는데 류승완 감독이 나를 좋아한다고 그러더라. <주먹이 운다> 대본을 받았는데 류승완 감독이 정말 진심으로 영화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인 게 보였다. 작품도 좋지, 최민식에 류승범이지, 배역이 크다 작다를 떠나서 너무 욕심나는 작품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맞아떨어졌다.<내 생애 아름다운 일주일>의 조사장 역도 인상적이었다. 관객 중에 게이 커플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라는 사람들이 많다. <내 생애> 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보면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본을 처음 봤을 때 <매그놀리아>가 생각났다. 그런데 이 작품이 <러브 액츄얼리>처럼 완성됐다. 옴니버스이긴 하지만 진정한 멜로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스케줄 때문에 하기 어려울 뻔했는데 그것도 내 운이다. 이슈가 돼서 고맙고 좋은데 내 욕심의 결과까지 나왔으면 좋았을 뻔했다.그 욕심이란? 조사장은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게 밝은 에피소드들하고 부딪치고 희석이 되더라. 결과적으로 다른 에피소드나 다른 배우 연기톤과 어긋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래도 조사장 커플 이야기처럼 너무 진중한 에피소드들만 있었다면 관객들이 그만큼 많이 찾았을까? 그게 그렇더라.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내 원래 생각대로라면 너무 칙칙했을 것 같더라. 민규동 감독이 중간선을 잘 잡았다. And I Love You So “ And yes, I know how lonely life can be. The shadow follow me and night won? set me free. But I don’t let the evening now that you’re around me.” - 페리 코모의 ‘And I Love You So’ 중 정말 효자라고 들었다(천호진의 아버지는 프로레슬러 천규덕 씨다). 우리 나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장남이니까 더 그러지. 한때, 힘들었을 때 방송생활하며 밤무대도 나갔다고 들었다. 했다. CF나 마찬가지지, 뭐. 절대로 창피하지 않다. 다시 돌아왔지 않나. 그 자리에서 헤매면 욕을 먹어도 되지만 이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버텼던 시간이기 때문에 자랑스럽다. 내가 모르던 인생 공부를 많이 했다. 밤 생활 하면서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또 다른 인생의 면을 발견했다. 그토록 천호진을 버텨온 힘은 무엇일까? 생각이 많지 않아서 견디는 거다.(웃음)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아등바등했던 거밖에 없다. 내가 소년가장이니까, 안 벌면 안 되니까. 연기가 전공이 아니어서 더 고맙다. 뭣도 모르고 덤비는 놈이 무섭지 않나. 몰랐기 때문에 아등바등하고 더욱 긴장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직업을 하고 싶다. 배우는 자유롭다. 생계도 생계지만 좋지 않았으면 어떻게 버텼겠나. 아이들도 자유롭게 키우나? 우리 애들 성적표를 한번도 안 봤다. 큰아이가 이제 대학 들어갔는데 걔 고 3때도 같이 앉아 DVD 봤다. 평생 네가 사랑하고 하고 싶은 일만 찾아라, 그게 가장 중요하다, 라고 말한다. 둘째는 아직 어려서 비몽사몽이고.목공 일도 그래서 하나보다(옆에서 최선중 PD가 다혈질이기 때문에 목공 일이 맞다고 한마디 거들었다). (웃음) 맞다. 굉장히 많이 다스려진다. 배우한테 취미라는 것은 중요하다. 예전에는 산에 미쳐서 돌아다녔다. 2년 동안 암벽에 미쳐서 돌아다녔다. 다른 세계를 경험하면 또 다른 뭔가가 생긴다. 나무도 5년 이상 만지다 보니까 나를 다스리는 길이 됐다. 오랫동안 다뤄온 기타를 치면 또 나를 다스리게 된다. 앞으로의 목표랄까? 영화를 다시 하게 됐다는 건 배우로서 일생일대 두 번째 최대 기회를 맞은 거다. 이 기회가 좋은 방향으로 계속 갔으면 좋겠다. 예순다섯까지만 딱 했으면 좋겠는데. 지금부터라도 영화판 자체가 신뢰를 못 쌓으면 내 꿈이 없어질 것 같아 속상하다. 관객들과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아이들 대학도 다 보내야 하고.(웃음) 좀 개인적으로는? 내 손으로 집 하나 짓는 게 꿈이다. 지금 나이에 겨우 조그만 땅 하나 장만했더니 법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더라. 법적으로 허용되는 곳은 너무 비싸고. 내 손으로 지은 집에 들어가서 살고 싶은 데 그걸 못하게 하니 답답하다. 요즘엔 아무리 밤샘 촬영을 해도 집에 가서 자게 된다. 타지에서 못 자겠더라. 점점 중성화되는 것 같다. 안사람한테 잘해야지. 글 최미현 기자 | 사진 고용훈 2006.06.21
